역사 바로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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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머뭇거리던 김영삼[편집]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그리고 광주시민 여러분!

저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5 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명예를 높이 세우는 일입니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 김영삼 대통령 담화문 #

1993년 5월, 김영삼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담화문에서 5.18이 “결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책임자들을 “과감하게 용서”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단죄를 ‘보복적 한풀이’라 표현했다.# 당연히 국민들의 반발은 컸다. 5.18 희생자들과 전·현직 국회의원은 물론, 기업인과 전 육군참모총장, 수도경비사령관까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전·노에 대한 고소·고발장이 검찰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반응은 놀라웠다. 1994년 10월,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등 12.12 군사 반란 관련자 34명에게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다. 12.12가 군사 반란이긴 하나, 국가 발전에 기여한 두 사람을 재판에 넘길 경우 국민들이 혼란을 느끼며 국력이 소모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임 검사였던 장윤석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전·노 기소가 “불필요한 국력 소모”라며 검찰 처분에 따른 고소인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만족할 것”이라는 말했다. # 이에 야당과 민주화 출신 인사들은 반발했고, 그해 12월 서울역 광장에서 시민 2만여 명이 국민 궐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1] 하지만 검찰은 한술 더 떠, 1995년 7월 5.18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살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죄가 되는지 여부를 아예 판단하지 않은 것은, 김영삼 정부가 그동안 주장해온 ‘성역 없는 수사’와 정면 배치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당인 민자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은 “검찰의 결정을 존중하며 5.18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발은 컸다. 7월 19일 5.18 단체 회원 80여 명 등이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항의 집회를 가졌고, 31일에는 고려대학교 교수 131명이 “5.18 불기소는 헌법 이념 전복”이라며 관련자 처벌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2] 전·노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도 빈번했는데, 경찰은 매번 강경 대응했다. 특히 8월 16일 벌어진 시위에서는 중앙일보 장문기 기자가 경찰의 집단 폭행으로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었으며, 단국대학교 학생 장원호 씨는 수평으로 발사된 최루탄에 눈을 맞아 실명했다.#

노태우 비자금 폭로[편집]

한편 8월 4일, 총무처 서석재 장관이 기자들과의 저녁 식사에서 전직 대통령의 4000억 원 가·차명 계좌 보유’에 대해 발언한 것이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다.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의 실력자가 대리인을 통해, 가·차명 계좌를 자금 출처 조사 없이 실명으로 전환해주면 2000억 원을 정부에 내놓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해명할 가치가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고 서 장관은 경솔한 언동을 이유로 곧 해임됐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박계동.png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통해 문제의 노태우 차명 계좌의 실체를 폭로했다. 4000억 원 상당의 비자금이 시중 은행에 차명 계좌로 분산 예치되어있다는 것으로, 박 의원은 예금 계좌 조회표, 계좌 번호, 차명인 이름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명확한 물증이 제시되자 궁지에 몰린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면서 “재임 기간 중 5000억 원의 ‘통치 자금’을 조성했다”고 고백했다. 취임 초, “부정 비리 척결에는 성역이 없다”며 “자신과 주변부터 엄격히 다스리고 깨끗한 정부를 실현”하겠다고 말한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비자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생 간의 유대가 중시되는 남한에서 고교 동창회는 중요한 행사로 꼽힌다. 95년 10월 16일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고층 빌딩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린 한 동창회 역시 그런 자리들 중 하나였다. 또한 그곳에서 있었던 두 동창생의 뜻하지 않은 조우는 수십 년간 남한 정계를 떠받치고 있던 정치 헌금 비리를 폭로하는 초대형 정치 스캔들의 발단이 됐다.

(중략)

기업가 하종욱은 당시 돈과 정치에 관련된 문제로 몹시 고민하던 참이었다. 동창생들이 악단의 연주 속에 잔을 주고받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한 동창생을 한 명 발견했다. 바로 2년 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박계동이었다. 그는 박 의원을 데리고 시끄러운 연회장을 벗어나 호텔 로비로 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문제의 발단은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93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친과 함께 수출입 물품 운송 중개업을 하던 하종욱은 거래 은행인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장으로부터 이상한 요청을 받았다. 그의 부친 계좌에 다른 사람 돈 110억 원을 입금시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던 것이다. 하종욱은 평소 신세를 진 것도 있고 해서 이를 허락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른 몇 가지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그 일에 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국정 개혁의 일환으로 '금융실명제' 도입을 선언했다. 가명 또는 차명 계좌를 악용해 불법 정치 자금이나 다른 수상쩍은 거래를 위한 돈을 은닉하거나 세탁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어 96년 1월부터 금융 소득에 대한 종합 과세가 시행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하종욱은 큰 곤경에 빠졌다. 당시 그는 부친의 계좌에 입금된 돈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 예금에 부과될 세금 약 7억 원 가량을 조만간 부친이 내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그렇게 큰 액수의 세금을 낼 능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노 대통령이 세금을 내라고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소기업 사장이 그런 거액의 자금을 모은 것을 수상히 여긴 세무당국이 세무 조사라도 실시하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종욱은 자신의 부친 외에 다른 2명의 같은 은행 계좌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금이 은닉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급해진 그는 박 의원에게 힘있는 정계 인사를 통해 세금이 부과되기 전에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야당인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 의원은 한국 정치에 만연해 있는 불법 자금의 폐해에 대해 오랫동안 반감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하종욱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기 두 달 전인 95년 8월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전직 대통령의 4000억 원 비자금 은닉설을 발표했다가 경솔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곧 해임당하자 박 의원의 분노는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업인 하종욱으로부터 구체적인 자금 액수를 들은 박 의원은 이제 비자금 은닉설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진술을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그는 하종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그의 진술 내용을 바탕으로 국회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할 무렵 4000억 원 상당의 비자금을 시중 은행에 차명 계좌로 분산 예치했으며, 이 중에서 300억 원이 하종욱이 거래하던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돼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예금 계좌 조회표를 증거로 제시했다.

박 의원의 국회 폭로가 있더 날 노태우의 오랜 경호실장이자 안기부장을 지낸 이현우는 서둘러 노태우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국회에서 거론된 비자금은 자신이 대신 관리해오던 자금의 일부라고 그에게 보고했다. 노태우는 검찰 측에 사실대로 말하되 그 전에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파기하도록 지시했다.

- 이종길 역. (2003). 두 개의 한국

사법적 처벌을 말아달라는, YS에 대한 신호였을까?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에서 '대선 자금'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이 폭탄 발언을 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사실 92년 대선 기간 중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김대중에게 실망하고 또 그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론 ‘여당 후보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과연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의심을 받게 된 김영삼은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다.[3] 11월 16일 노태우는 구속되었고, 24일 김영삼은 신군부의 정권 찬탈 전 과정을 다루는 ‘5.18 특별법’의 제정을 지시했다.

'세기의 재판'이라 불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처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
1940년대
8.15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50년대
6.25 전쟁 진보당 사건 -
1960년대
4.19 혁명 5.16 쿠데타 동백림 사건
[[]] [[]] 김영삼 질산 테러
1970년대
광주 대단지 사건 유신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 부마 민주화 운동
YH 무역 사건 10.26 사태 12.12 쿠데타
1980년대
서울의 봄 5.17 쿠데타 5.18 민주화 운동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국풍 81 아웅산 묘소 테러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건국대 사건 6월 항쟁
대한항공 858 폭파 사건 서울 올림픽 1989년 공안정국
1990년대
3당 합당 1990년 KBS 사태 보안사 민간인 사찰
중부지역당 사건 역사 바로 세우기 연세대 사태
2000년대
2010년대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Coup.jpg
1980년 전후의 사건들
10.26 사태 12.12 쿠데타 서울의 봄
5.17 쿠데타 5.18 민주화 운동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1. 고려대학교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5), p.413
  2. 고려대학교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5), p.413
  3. 이종길 역. 두 개의 한국 (길산, 2003), p.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