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KBS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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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편집]

권위주의 시절 정부의 나팔수 역할을 해왔던 방송국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에 합류하며 자율성과 독립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결과물이 1989년 3월 8일 KBS에서 방영된 <광주는 말한다>였다. 이 프로그램은 그동안 은폐되었던 학살극의 진상을 낱낱이 드러내었으며, 후에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방송사들이 5공 내내 '5.18 폭동'과 '선진 조국'을 부르짖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국민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광주는 말한다>는 7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5공 비리 관련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방영"해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했다.

신군부의 연장 선상에 서있던 노태우 정권 입장에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 여당인민주정의당 대변인 박희태는 "우리가 믿고 사랑하던 KBS의 품위 양식 깊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실망치 않을 수 없다." 며 '공정성과 품격'을 운운했다. 국방부도 항의 성명을 통해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이 광주에서 저지른 일련의 행위들이 "공권력 수행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강경한 자세는 곧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공안 정국으로 각계의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고 있었으며[1]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의석 수 200석이 넘는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이 출범한 덕분이었다.

전개[편집]

1990년 3월 KBS 서영훈 사장이 수당 지급 문제로 물러났는데, 이는 "KBS 직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경리상의 실수로 절차상의 하자를 범한 채 89년 12월에 몰아서 받은 기술적인 문제"였을 뿐이었다.

며칠 뒤 정부는 KBS 새 사장에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임명하였다. 그는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으며 서울신문 사장 재임시 노조 탄압에 앞장서 검찰에 고발된 바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임 사장은 출근 첫 날부터 노조를 공권력으로 억눌렀다. '방송 장악' 논란 속에서, 민주당 이철 의원은 "KBS의 방송 민주화 노력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견지해온 서영훈 (전) 사장에 대한 사퇴 압력"이 있었음을 폭로했다. "지난 1월 말과 2월 초순 안기부 요원들이 서(영훈) 사장 자택인 목동의 아파트 경비실을 수차 출입하면서 내왕객에 대해 탐문하는 등 불법적 사찰을 자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의 입장은 완고했다. 4월 23일 내무부, 법무부, 노동부, 공보처 장관들은 합동 담화문에서 계속되는 KBS 노조 파업에 대해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으며, 28일 최병렬 공보처 장관(뒷날 한나라당 대표)은 '최후 통첩'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민자당도 가세했다. 민자당은 "노조가 본연의 임무를 저버렸다"며 서 사장을 옹호했고, "KBS 사장 임명은 대통령의 통치권 행사의 일환이기 때문에 국가 기강의 확립 차원에서도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편 KBS 한운사 이사가 사장 임명 제청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혔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 사장은 더 나아가 4월 29일 국회 문공위에서 '국권 수호'를 위해 사장직에서 물러날 수 없다고 말해, 야당 의원으로부터 "우리나라 5급 이상 공무원은 다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권이 수만 개나 된다는 말이냐" 는 면박을 받기도 했다.

KBS 파업에 대한 공세에는 다른 언론도 거들었다. 대체로 '방송 중단' 으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를 우려하는 논조였다. 일례로 조선일보는 4월 18일 홍사중 칼럼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전혀 권력에 꼬리 흔들리지 않고 때묻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며, 그 중에서도 KBS와 같은 거대한 조직을 제대로 꾸려 나갈 수 있을 만큼 경영 능력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언론 자유를 외치던 자사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면서까지 권력과 유화 관계를 유지하며 1등 신문으로 성장해온 조선일보는 어두운 과거를 슬그머니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민자당 의원들 모두가 서기원 사장을 편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강삼재 민자당 의원은 "사태 악화의 결정적 계기는 서 사장의 공권력 투입 요청이며 목숨을 걸고라도 공권력 투입을 막아 대화로 수습해 나가야 할 사장이 스스로의 책임과 자격을 포기한 것" 이라며 서 사장 퇴진을 촉구했다. 또한 최병렬 장관에 대해서도 "노조의 반대 속에 굳이 서기원 사장을 임명, 방송 중단 사태를 불러온 책임을 느끼지 않느냐" 고 따지기도 했다.#

결과[편집]

결국 공권력의 재투입으로 관련자 333명이 강제 연행되면서 KBS의 파업은 끝이 났다. 방송은 정상화되었지마나 검찰은 노조 간부 등을 구속했으며, 그 해 10월 29일 전·현직 노조 위원장 안동수, 김철수 씨가 법원에서 각각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시청자들은 다시 TV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왕의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에도 방송 노조의 대답 없는 외침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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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89년, 일부 사회 인사들이 '조국 통일' 의 미명 하에 정부의 승인 없이 불법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정부가 이에 강경 대응하면서 '공안 정국'이 형성되었고, 통일 운동 뿐 아니라 교원 노조 운동, 노동 운동, 민주화 운동, 학생 운동까지 위축되었다. 8월 19일 열린 영등포 을구 재선거에서 민정당 후보가 큰 표차로 당선된 것은, 정부의 '좌경 세력 척결' 에 상당수 국민들이 동의했음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안 정국 하에서 통일민주당은 소외 계층이나 재야 단체의 요구를 거의 무시했고 평화민주당 역시 재야 운동 단체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노골적 탄압에 형식적인 비난 성명조차 내기를 주저했다. 한겨레 1990년 1월 23일